Swing Time Machine #1

2008년 즈음에 내가 활동하던 스윙댄스 동호회에 썼던 글을 옮겨왔다. 열정적으로 스윙댄스를 덕질하던 시절이었는데, 그 시절의 기억이 나에겐 좋은 추억이라 작은 조각이라도 내 개인 장소에 기록해두고 싶었다. 유튜브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는 않았던 시절이라 스윙댄스 영상도 많지는 않았었는데, 그나마 열심히 찾아서 걸었던 링크들도 다 깨져서, 영상은 새로 찾아 걸었다. 텍스트는 지금 읽어보니 유머랍시고 혐오나 차별적인 발언을 많이 해 실망스럽고 부끄럽지만(팻츠 월러를 욕할 자격이 없다ㅠ) 그래도 과거의 나를 인정하고 반성의 증거로 남기기 위해 원본 그대로 올린다.

안녕하세요~ 초록거인입니다.^^ 어느새 벌써 4주, 절반이 지났네요. 벌써 4주라니..한달이라니! 춘삼형이 야동 보실때 하신 말씀처럼 일각이 여삼초네요.ㅋㅋ 리듬의 새로움과 즐거움에 빠진 것도 잠시. 지난 2주간의 빡센 스트레칭으로 인하여 심신이 지치셨을텐데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갖고자 또 한번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오늘은 날씨도 추워지니 이놈과 함께

고고씽!

질문으로 시작해볼까요? 자, 현재 미국 재즈의 역사적 중심지라고 묻는다면 어디일까요? 두구두구두구. 뉴욬, 맞습니다. 맞고요. 속칭 빅애플이라고도 하죠 재즈의 메카라고 하면 뉴욕을 꼽습니다. 그럼, 린디합의 역사적 중심지라고 묻는다면 어디일까요? 네. 역시 뉴욕입니다. 뉴욕의 할렘가를 역사적 중심지로 꼽죠. 그렇다면 한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첫 번째 글에 분명 재즈는 뉴올리언즈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즉, 오리지날은 뉴올리언즈인데, 이상하게도 뉴욕을 더 오리지날로 쳐주고 있는 셈이 된것입니다. 재즈건 린디합이건 말이죠. 왜 그럴까요? 안궁금하시다구요…OTL 그 이유는, 첫 글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재즈음악이 1900년도 초기에는 유흥을 즐기는데 필요한 음악 정도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에, 연주자들은 상업이 번영하는 곳을 따라서 움직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술 따라, 돈 따라 움직였다고 할까요. 뉴올리언즈에서 시카고로, 환락의 도시 캔사스 시티로, 이동을 거듭하던 연주자들은 뉴요쿠에 도착합니다.

뉴욬~뉴욬~

뉴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사람들이 이주하던 초기부터 미국 역사의 중심에 있던 도시였습니다. 대서양을 끼고 있는 항구도시이기 때문에, 문화, 경제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죠. 월스트리트, 브로드웨이. 다들 아시죠? 시대의 음악, 재즈는 이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로 점차 모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재즈 뮤지션들이 모였다고 해서 재즈의 메카가 될 수는 없죠. 스윙시대가 끝나고, 재즈가 예술로 승화되는데 불씨가 되었던 비밥. 52번가의 민튼즈 플레이 하우스 같은 곳에서 활화산 처럼 타올랐던 비밥의 열기가 엔터테이너가 아닌, 뮤지션들을 만들어냈고 그들에의해 재즈는 예술로 승화되기 시작합니다. 때문에 이곳을 재즈의 메카로 여기게 되었던 겁니다.

여전히 건재하는 민튼즈 플레이 하우스(https://mintonsharlem.com/)

“Going to Minton’s Playhouse was like going to church,” says legendary jazz vocalist Sheila Jordan, who moved from Detroit to New York in 1950, famously following Charlie “Bird” Parker. “Everybody came. Miles, Bird, Monk, Dizzy, Billy Taylor … you name it. We’d all take the A Train up there after the other clubs closed,” she says.

마찬가지로, 스윙댄스도 그런 이유로 뉴욕에서 발달했으리라 생각해요. 뉴욕에서는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뮤지컬이나 보드빌(춤과 음악이 섞인 희극)이 이미 20년대부터 발달했었습니다. 영화 킹 콩에서 여주인공이 저글링을 하면서 공연했던 극단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보드빌이라고 생각되네요. 어쨌든 이런 뉴욕에서는 춤이 자연스러운 소재가 되었겠고, 스윙재즈가 나타나면서 린디합이 탄생했습니다. 바야흐로 제대로 된 춤판이 벌어진것이죠. 우리나라 홍대 클럽을 떠올리시면 될듯 합니다. 다만, 부비-부비가 아하-아하, 웨이브 웨이브가 홉~홉으로 바뀌었을 뿐이지요. 하하.

그 중에 가장 유명했던 곳이 사보이(Savoy Ballroom)댄스 홀이였는데요.

사보이 볼룸!

유일하게 백인과 흑인이 같이 섞여 춤을 출 수 있었던 곳이었기에, 늘 걸출한 흑인 댄서들로 북적였습니다. 아시겠지만, 인종차별이 심했던 그 당시, 흑인들은 백인들의 광대 노릇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백인들만 출입가능한 업소인 코튼 클럽(Cotton Club)같은 곳에서의 그들의 춤은 춤이라기보단 백인들의 눈요깃 거리였겠지요. 댄스 뿐만 아니라 사보이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기도 했고, 농구 경기가 있었다고도 하네요ㄷㄷㄷ, 뭐랄까. 흑인들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메카라고나 할까요.. 자유롭게 춤추고 놀 수 있는 그곳. 그들에겐 천국이 아니었을까요? 또한 Chick Webb 오케스트라, Count Basie 오케스트라, Benny Goodman 오케스트라와 같은 당대 최고의 밴드들이 클럽에 출현해서 춤판을 뜨겁게 달구었었습니다.

사보이 댄스홀의 빅밴드 오케스트라와 댄서들

좋은 음악과, 깔끔하게 차려입은 어메이징한 댄서들. 환상적인 바닥. 사보이 볼룸이 린디합의 메카가 되었던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요..

Savoy Ballroom 1

Savoy Ballroom 2

어쨌든 이런 사보이 클럽에서의 열정은 자연스레 주목받는 댄서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그 중 가장 유명했던 댄서가 바로 쇼티죠지(Shorty George)였는데요, 본명은 George Snowden 이지만 영상을 보시면 아시듯이, 말그대로 ‘쇼티’ 했기 때문에 별명으로 붙여지게 되었답니다. 그는 그의 파트너 Big Bee(ㅋㅋ)와 언발란스한 코믹스러움을 보여주면서도 강렬한 풋워크와 운동력으로 사보이 홀을 제패합니다. 사실 그가 활동했던 20년대, 30년대 초기는 아직 린디합이 완성되기 전이 었지요. 제가 미리 드린 링크를 좀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break away와 charleston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답니다. 그때 쇼티죠지는 파트너쉽을 더 발전시켜서 린디합의 모습을 만들어냈다고 하네요 사실 LindyHop이란 말도 이 쇼티죠지의 입에서 나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제가드린 링크(http://club.cyworld.com/50115463131/112289378 이쯤되면 다시 보시겠지요?ㅋㅋ)에서 이미 읽으셨겠지만, 그 린디합이란 말을 한 주인공이 쇼티죠지였다는 얘기이지요 1928년 뉴욕의 자선 댄스 대회에서 리포터가 쇼티죠지에게 ‘이것이 뭔 춤입니까?’ 물었더니. 그가 ‘저는 합을 하고 있습니다. 린디합이요!’ 라고 대답했다고 하네요. 그의 이름을 딴 음악이 있고, 그의 이름을 딴 동작이 있을만큼 린디합에서의 그가 한 공헌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 그럼 춤사위를 한번 보실까요?

아~~~나이쓰. 어썸. 어메이징. 발에 부스터가 달린듯 초 패스트 음악에 저리 가볍게(흑인들의 운동력이란!) 움직이다니..

빅비와의 언발란스를 이용한 동작들..광대같이 익살스러운 동작들도 재미있고요.. 뭐 어떻게 생각해보면 조금은 슬프기도 하지만요. 그래도 뭐 지금 보면 유쾌하네요^^

어쨌든 이들이 이렇게 20-30년대 사보이 바닥을 주름 잡고 있을 때 혜성같이 한 총각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이사람. 린디합의 살아있는 전설. 바로 프랭키 매닝(Frankie Manning)입니다.

짠!

1935년에 개최된 큰 메이저 대회에서 그는 최초로 에어리얼 동작을 작렬시키면서 쇼티죠지를 제치고 1등을 차지합니다. 처음으로 에어를 작렬시켰을 때 사람들의 반응. 상상이 가세요? 아마 엄청난 충격이었을 거에요.

In a famous competition… Frankie astonished the crowd of 2000 with the first Lindy airstep ever done

이 충격적인 사건 이후 스윙’킹’은 쇼티죠지에서 프랭키매닝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가 선보인 최초의 에어동작은 리더와 팔뤄가 등을 맞대고 팔뤄를 뒤로 넘기는(back to back)이라는 동작인데요. 사실 이건 쇼티죠지의 모습에 영감을 받아서 한거랍니다. 위에 죠지의 영상에서도 마지막에 얼핏 나오죠. 여튼 그 이후로, 프랭키 매닝은 쇼티죠지의 공연팀(The Shorty Snowden Dancers)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지만, 거절하고 새로운 공연팀에 들어갑니다. 사보이 클럽의 매니저였던 Herbert White가 1935년에 만든 Whitey’s Lindy Hoppers의 안무가겸 수장으로 들어가게 된거죠. 일종의 라이벌 의식이었을까요? 하하. 저는 처음에 Whitey’s라고 해서 무식한 생각에, 백인들을 위해서 이름까지 그리 지었나? 싶었지만, 뭐 사람 이름이었답니다. 그 이후로 약 10년간 그는 엄청난 창의력을 바탕으로 최근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린디합의 모습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수많은 댄서들이 그 올드 무비들을 보면서 스윙의 부활을 이끌어 냈었죠. 80년대 이후에 말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창의적인 혁명을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쇼티 죠지와 프랭키 매닝. 역사에서 그들을 기억하는건 단순히 춤을 잘추기 때문이 아니었겠죠~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감동적인 동작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일겁니다. 그야말로, 린디합의 혁명가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거에요.

자 그럼 그의 춤사위를 한번 볼까요? 아쉬운건 제너럴 영상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뭐 당연하겠지만요. 누가 그 시대에 일부러 카메라를 들고와서 흑인들이 춤추는걸 찍겠어요. 그나마 다행인건 그들이 영화에 많이 출현했다는 거에요. 때문에 영화를 통해서 그의 모습과 공연팀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답니다. 가장 유명한 영상이에요 1941년에 개봉한 Hellzapoppin’ 이라는 영화. 주인공이 택시에서 내려보니 지옥에 떨어졌더라..그래서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영환데요 암튼, 중요한건 우리의 Whitey’s Lindy Hoppers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매닝 할아버지도요. 댄서 중에 사람들을 리드하면서 멜빵바지를 입고 수리공 같이 보이는 사람이 바로 매닝입니다. 한번 보세요. Back to Back 에어도 하네요^^

Hellzapoppin’ 1941

전 처음 이 영상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 아니더군요… 뭐 사실 지금도 별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ㅡ_ㅡ;

스윙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스윙 댄스도 서서히 접히게 됩니다. 일전에 썼던 글에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로 돈문제와, 롹앤롤의 등장문제 등등이 그 이유가 되었구요. 1947년에 Congaroos(콩가루쓰? 응?ㅋㅋ)라는 소규모 공연팀을 매닝이 조직했지만 그마저 1955년에 해체되고, 스윙댄스는 서서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 후 매닝 할아버지는 우체국에서 일했다고 하네요.

Lindyfest 2008에서 매닝할아버지와 던햄튼(가수)할머니의 댄스…감동적이네요ㅠ
(그들 옆에 서있는 치마 입은 처자는 춘삼형의 그 처자! 다시 출현!)

내년에 매닝 할아버지가 한국에 오시기로 하셨다는데. 건강문제로 성사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올해 93세신가 하실텐데요 (94세라고 하시네요)가서 한마디라도 듣고 싶은 마음입니다만…흠… 참, 관심 있으신 분들은 매닝 할아버지가 쓰신 자서전 ‘Ambassador of Lindy Hop’이란 책을 사서 보셔도 좋을듯 합니다. 저도 한번 읽어보려구요. 물론 모두 영어지만~~~~ㅠ

자…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하기로 하고요, 다음에는 서부의 린디합 스타일(Hollywood Style)과 동부의 린디합 스타일(Savoy Style)이 어떻게 다르게 변해왔는지 알아보고요 또, 80년대 스윙이 부활하게 된 과정을 좀 풀어볼께요

그럼~ I’ll be back!